뱃고동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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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고동이 울린다
  • 정상조 시인
  • 승인 2022.06.22 2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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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조의 명상여행]
사진:Pixabay
사진:Pixabay

뱃고동이 울린다 / 정상조 

나도 갑판 위에 섰다
비로소 가슴 툭 틔는 바다
벌집 같은 곳에 기어들고 나던
도시라는 감옥에서 살다가
바다를 보니 불현듯
시커멓게 찌든 내 가슴에
전기 가설을 하여
등불을 밝히고 싶었다 

태풍에 근심을 더해 살고 있는
한 점 섬
도착한 우린 모두는
험한 길을 따라
전봇대를 심기 위해 발파작업을 하고
흙을 파고, 바위를 쪼고
집집마다 불을 밝히는 전기 가설
이 집 저 집 찾아 다니며 거미줄처럼
그물을 쳐간다 

단추 하나를 꾸욱 누르는 순간
아침햇살처럼 밝아오는 등불!
섬에서 살아서 괴로운 집에도
섬에서 살아서 눈물 많은 집에도
처얼썩 파도에 전등불이
집집마다 동백꽃처럼 피어난다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재주가 용하네요?”
“오죽하면 이런 곳에서 살았겠소”
내 물음에 쓴웃음 짓는 기열이의 대답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고기잡이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오
온 가족이 여자인 그 틈에
나는 무슨 희망으로 이 섬에서 살아가겠소
수평선 너머 저 육지에는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서글프다오”
기열이의 절규였다
“바다가 달을 따라 움직이고
해를 따라 움직이고
바람에 휩쓸려 파도 치듯
살아가는 즐거움이야
어찌 없겠소마는.
달이 좋아 움직이고
해가 좋아 움직이고
바람이 좋아 파도 치겠소
살다 보면 모두 좋아지리란 생각밖에”
기열은 시선은
먼 바다에
전봇대 하나를 세워놓은 채
살고 있다 

온갖 즐거움도
기다림도
고통도 싣고 왔다 싣고 가는
파도가 별천지인 일 점 섬 

언덕배기 기열이의 집에서는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내 눈에는 앞이 확 트이는
광활한 기쁨으로 보이는데
한숨 쉬는 섬사람들
편견의 척도에서 사는 현재에서
미지로 배를 타고 가는 인생 항로
할머니, 어머니, 기열, 미연
바다를 향해 한숨짓는
그들의 얼굴에는 바다가 출렁거린다
파도가 출렁거린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장만한 건 없지만 식사 많이 드세요!”
어머니 뒤를 따라 음식을 들고 오는
미연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늘 미연과 얼굴을 붉혔다
애써 시선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 그 동안 고생 많으셨겠네요” 
할머니는 곧장 넋두리다
“바다에 갔던 그날이 영영 이별이었어
태풍만 아니었더라도 ......
바람이 불면
내 낭군 어디에서 풍랑을 피하려나
만선의 기쁨 들고 오려나
산들바람에도 가슴 저미는 어언 칠십
동백꽃 등걸처럼 늙었으니
동백꽃 들고 오려나”
어찌 된 일인지 섬사람들 말은
한 편의 시를 늘 바다에 떠나 보내고 있다
파도에 지아비를 잃고
자식도 잃고
조약돌처럼 닳아서 사는데
미연이 할머니의 얼굴
울거나 웃거나 일그러진 주름살은
늙은 동백나무 등걸처럼 한숨이
애끓는다 

“요즘 고기가 무던히 잡힌다고
고기를 많이 잡아서
이쁜 옷을 사다 준다며 나갔던 
아버지의 미소
그 얼굴 잊을 수가 없어요
저는 바다를 헤집고 다니는 해녀랍니다
무거운 납덩이를 매고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난파선을 탄 넋두리가 유전되는
외로움은 고통이지요“
미연은 눈물 훔치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모진 해풍에 피는
한 송이 동백꽃이 있다 

나는 처음 갑판 위에서
바다가 넓음을 보고 자유를 느꼈는데
지나보면 바다는 나를 가두고 있다
등불을 밝혀 주려갔다가
뜻하지 않는 일들 속에
묘하게 나의 몸에서는
미연의 체온이 살아 숨을 쉰다 

시간이 수많은 날을 잉태하고 나면
항구는 이별이라는 숙명 속에 놓인다
일이 끝나갈수록
동백꽃도 전등 불빛도 만발해져 간다 

“이것도 좀 먹어 보우
그동안 고생 많았어!
섬에 전등 불빛이야 훤한데
서운이야 말로해서 무엇하겠나”
미연이 할머니와 마지막 날 밤
눈물에 한숨을 보태어
“소금 배 타던 옆집 영구가 죽었디야
옆집 영구가 ...... 죽었디아”
미연이가 손수 잡아왔다며
할머니는 연신 내게
많이 먹으라고 권한다
금방 눈물이 가득히 고인 할머니
“그래, 기열이한테 들었어
내일 떠난다며!”
“애그 어머니 좀 조용히 하세요
영구네  말은 왜 꺼내가지고” 

동백꽃 가슴으로 밀려와
동백꽃 가슴으로 밀려가는
넘실거리는 눈물의 파도
센 바람에 부딪쳐
고목이 되도록 크지 못한 동백꽃 얼굴들
아! 이 섬 동백꽃은
빨갛기만 한데
바람에 찢긴 한 뼘 키
주름진 옹이마다
할머니, 어머니, 기열, 미면
자꾸 눈물을 훔쳐낸다 

“만나면 헤어진다는 바다 앞에
벌써 우리가 서네요?
이 섬은 제게 현실이랍니다” 

섬이여!
동백꽃이여!
아침은 변함없이 밝아
다음 날 떠나는 사람 중에 내가 있는데
내가 사랑하던 동백꽃은 어디서 울고 섰는지 

무거운 발걸음 옮겨 놓을 때
정박한 배엔 소, 염소, 사람이 떠들썩한데
기열과 할머니의 눈물 어린 모습뿐
미연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다
뿌우!
뿌우! 뿌우! 뱃고동이 울린다
“잘 가시오. 고생들 많았어”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무심한 배가 여객을 더 태우기 위해
뱃길 따라 섬 반대쪽 항구로
뿌우! 뿌우! 울며 떠나간다 

“그래, 잘 가거라. 어서 가”
“네, 어머니”
오! 미연 어머니의 손사래
눈물을 훔치며 내 가까이 다가오는 미연
“미안해요
이 섬은 저에게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어요”
뿌우 뿌우
뱃고동이 울린다 

 * 에필로그 

1990년도에 내가 거문도 서도리에 전기 가설을 일당 일을 갔었을 때 현지 인력 중에 기열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 집에 가면 늘 해산물로 음식이 나오는데 할머니의 남편과 아들이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지 않아서 늘 넋두리가 일상이었고

해녀인 기열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고생이 많았고 늘 음식을 만들 때면 눈물바람이었다

미연이라는 여동생이 있었고

그때 나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과 괴테의 "도로테아와 칼리오페"라는 서사시에 심취해있었다

그래서 이 시를 쓸 때 미연을 허구로 등장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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